

화순리는 선사시대의 유적, 지명과 씨족 유입을 근거로 한 화순리 설촌 단계는 3단계로 ① 선사 거주시대 ② 1차 설촌(중세) ③ 2차 설촌(근세)으로 나누어지는데, 이 지역에서 설촌이 지속되지는 않았으며, 시대별로 이주와 퇴거가 반복되는 과정속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1840년대에 동수동(골물)과 범천동(번내) 통합되는 과정을 거쳐 오늘날의 화순리가 설촌되었다.
현재 거주민 씨족의 유입은 1600년대 초반 창녕성씨가 엉은동으로 이주하였으며, 거의 비슷한 시기(1600년대 후반)에 이주한 제주양씨는 범천동으로, 밀양박씨는 곤물동(동수동)으로 이주하였고, 이보다 조금 늦은 1700년대 초반에는 충주지씨가 지금의 서동(만주왓)으로 이주해 왔다.
그러나 옛기록인 『탐라순력도』와 『탐라지도』에는 “번내”라는 지명이 나타나고 있어 성씨, 양씨, 박씨, 지씨 등의 입촌 이전에 마을이 형성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골물(동수동)과 번내(범천동)가 독립적인 마을로 유지되어 오다가 1800년대 중반(1843∼1846년)에 한 마을로 통합되어 화순(和順)으로 개명되었는데, 화순이라는 이름은 통합과정에서 “서로 화합하고(和) 순하게 살자(順)”라는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